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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문화

(오월특강) 상처 입은 시대를 위한 치유의 노래, 음악평론가 강헌님 강연 후기

노무현시민학교는 노 대통령 4주기를 맞아 ‘오월특강’을 열었습니다. 5월 1일 유시민 전 장관을 시작으로 8일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15일 박원순 서울시장, 22일 강헌 음악평론가가 강연을 했습니다. 매주 강연마다 그 내용을 정리한 ‘강의요약’을 싣습니다. 22일 강헌 음악평론가의 ‘상처 입은 시대를 위한 치유의 노래’ 강연은 수강생 장재훈(닉네임 ‘으뜸벗’)님이 정리했습니다.

[오월특강④] 강헌 “아직도 한국은 문화적 야만의 시대”

“베토벤, 음악적 투쟁으로 새 세상 보여준 로커…유토피아 꿈꾸는 인간의 상상이 음악”

장재훈/수강생

노무현을 만나는 다섯 가지 이야기, 그 네 번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5월 23일입니다. 어제 밤부터 제 페이스북의 뉴스피드는 온통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여전히 비판적인 의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분노하다가 마음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고 있는 날입니다.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쓰다

사실 어제 강연은 후기를 작성하기에 벅찬 강연이었습니다. 사실 베토벤, 모차르트의 이름 정도만 겨우 들리는 저로서는 외국인의 이름, 작품, 출생 연도 등이 막힘없이 강헌님의 입을 통해 나올 때 이미 따라 적는 것을 포기했습니다(제 후기는 주로 키워드를 메모해와 살을 붙이는 방식인데, 키워드 적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전인교육을 한다고, 8살 큰아이와 보르딘심포니오케스트라 공연에 가서 저는 잘 모르는 클래식을 듣는 척하고, 큰 아이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서도 (지적 허용심에) 그래도 뿌듯해 했던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국악 관악합주 수제천. 천민 출신 악공들이 유일하게 현실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음악뿐이었다.

이야기는 거짓이어도 노래는 참말

1.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페이터의 수필(산문)을 보면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예술 중 음악이 최고란 의미)라고 적혀 있다. 이는 우리 할머니들이 ‘세상의 이야기는 거짓이어도 노래는 참말’이란 말과 동일하다.

2. 헤겔, 루카치 등 사상가도 음악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는 소설이 언어란 매개체를 사용한 것에 비해 음악은 자연의 소리로, 브라암스 교향곡 4번 테마를 들으면 인간의 삶은 허망(또는 다른 느낌)하다고 느껴진다. 즉 ‘음악은 고도의 추상성을 가지고 있고 바로 이해될 수 있는 매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가 되는 것이다.

3. 소설, 영화로 상처를 극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음악이 힐링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예를 들면 실연 후 소설을 보는 것보다 음악을 듣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

4.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쌍한 존재로, ‘생로병사’라는 단어만 보아도 인간은 ‘태어난 것(生)’ 말고는 나머지는 모두 우울한 이야기뿐이다. 최근 장강명의 ‘표백’이란 작품을 보았는데, 자살클럽이 나오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로서 집행일만 모른다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비극성을 가진 존재란 표현에 공감했다. 즉 인간은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모든 시대는 상처 입은 시대이고, 때문에 유토피아는 존재한 적이 없다.

인간의 유토피아, 음악으로 상상하다

5. 봉건사회에서 유토피아는 태평성대를 말하지만, 세종대왕 때조차 노비의 관점에서 보면 태평성대가 아니다. 즉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꿈꿀 수밖에 없는 게 유토피아(태평성대)였다. 이러한 상상에 도달한 것이 음악으로, 힐링과 상처 치유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6. [잠시 연주를 감상했다] 우리 국악 수제천(아악(雅樂)에 속하는 국악합주곡)은 궁중(왕가)의 음악으로 장중하다. 주로 조선시대 왕세자 행차 등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음악적으로 4계의 음계만 이용한 단순성과 호흡이 길다는 것이 특징으로 호흡에 기반한 폐장음악으로 서양음악 즉 심장(박자)에 근거한 서양음악과는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접근방법도 다르다. 국악의 ‘장단’이 낯선 이유는 심장이 아닌 폐의 호흡을 따라가며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7. 조선시대 이상향(태평성대)에 대한 갈구가 수제천에 스며들어 있다. 수제천을 들어보면 “딱’하는 박소리로 시작과 끝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는 시간을 나눔과 동시에 사유의 구분을 짓는 것으로, 현실 밖의 시간과 공간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현실과 이상을 분리하고자 하는 욕망(마지막 “딱”소리와 함께 현실로 귀환)의 표현이다.

음악가들의 사회적 계급과 일치하는 음악

8.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인도음악을 비교해보면 당시 음악가들의 사회적 계급의 특성과 일치한다. 인도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들의 계급은 브라만이었다. 인도 사회계급 중 상위층인 브라만에게는 삶의 공포가 없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들로 꿈같은 음악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음악은 자신과 신과의 대화로서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가 없다. 1960년대 미국의 진보적 청년들(나중에 ‘히피’로 불린 그룹)이 인도음악에 심취한 배경도 이와 관련돼 있다.

서양음악 작곡가들은 사회적 중인으로 귀족이 아니었다. 즉 그들에게 음악은 작곡을 잘하면 귀족과 어울릴 수 있는 수단이었으나 뜨지 못하면 하층민보다 못한 존재가 음악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음악은 세속적이었고 듣는 사람을 한방에 매혹시켜야 했다. 세속적 욕망에 기초한 음악이었다. 모차르트의 일생은 정규직(궁정악장)이 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아스의 말에 의하면)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였기에 결국 궁정악장이 되지 못한다.

국악을 보면 고려, 조선에서 악공, 악생은 사회적 지위가 천민이었다. 양천조차 되지 않는 천민으로 운명이 정해진 그들의 태생적 한계가 이상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하는 (수제천에서 “딱” 하는 박소리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린 것과 같은) 음악을 만들었다. 귀족의 음악은 삶의 현실과 이상이 같으나, 천민의 음악은 고단한 자신의 현실과 이상이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9. 정의, 평화를 제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 대부분 시대는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 이 자리에 음악이 스며들고, 절망한 인간들은 종교를 만들고 의지했다. 서구음악의 절반은 교회음악으로 신에 대한 찬미, 다시 말하면 이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자유, 정신적 평화를 갈구한다.

바흐의 마테수난곡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Bach - St. Matthew Passion BWV 244 (Karl Richter, 1971)

부르조아 시대 ‘바흐’의 부활

10. 서양 음악사에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 하는데 그에 대한 사실적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같은 시대 동갑내기 음악가로 바흐와 헨델, 베르디와 바그너가 있다. 바르크 시대를 대표하는 바흐와 헨델은 생존 당시에는 그들의 처지가 아주 달랐다. 바흐는 독일 한 지역의 로컬음악가로 동네음악가였을 뿐이고 헨델은 당시 유럽 전체를 순회 연주하는 유명한 ‘슈퍼스타’였다. 당시 오페라는 지금으로 보면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만드는 규모의 재정이 필요했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야 만들 수 있었다. 오페라 작곡 편수만 봐도 헨델은 70여 편이나 만들었지만 바흐는 그의 1,200여 개 작품 중 오페라는 단 한편도 없다.

11. 그런 바흐가 사후 100년이 지나 재평가를 받게 된 계기는 20세 청년 멘델스존이 푸줏간에서 고기를 싸준 종이에서 발견한 마테수난곡 악보에서 시작되었다. 바흐는 근면 성실했다. 죽기 3년 전에는 실명이 오고, ‘과로사’ 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바흐의 명곡으로 꼽는 마테수난곡은 1729년 초연 이후 100년간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다. 잠자고 있던 이 곡은 멘델스존에 의해 1829년 재탄생하게 된다. 1859년 유럽에 바흐협회가 생길 정도로 이후 바흐의 음악은 재조명을 받는다.

12. 1900년 바흐전집이 출간된다. 멘델스존은 유대계 금융자본가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38살에 사망했으나 그래도 은수저 정도는 물고 태어난 사람이다. 바흐가 새롭게 조명받는 과정에는 프랑스혁명으로 왕권이 몰락,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는 시대적 영향이 있다.

13. 바흐는 프로테스탄트(신교도)였다. 칼 맑스의 표현대로 “(승리한) 계급의 역사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처럼,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는 성실 근면했던 프로테스탄트 바흐를 그들을 대변해줄 ‘음악의 아버지’로 선택한 것이다. 왕정, 귀족사회가 몰락하는 시기에 근면과 성실로 무장된 바흐의 발견은 방탕한 생활을 했던 헨델과는 부르주아 계급이 내세울 만한 음악가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노력과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는 없다”는 부르주아 사상과 시대가 바흐를 선택한 것이다.

Leadbelly ‘Cotton fields’. 노동요 Cotton Fields의 원곡가수인 Leadbelly보다 백인그룹 CCR의 음악으로 더 알려져 있다.

베토벤은 로커였다

14. 베토벤은 공화주의자로 그가 살았던 나폴레옹 시대가 위대했던 것은 인간의 모든 내면(상처, 고통, 더러움 등)을 검열 없이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인간의 고통이나 상처를 그대로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가장 행복했던 음악가였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우아함으로 포장된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 베토벤은 많은 일기(총 5권)를 남겼다. 음악으로는 위대했을지 모르지만, 인간 베토벤의 사생활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일기를 보면 ‘오늘 하녀를 해고했다, 그녀는 너무 많이 먹는다’고 적혀 있다. 57세로 사망한 베토벤은 부르주아 계급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보고 죽은 사람으로 ‘고뇌를 넘어 환희의 세계’, ‘장엄미사(신이 아닌 혁명적인 인간에 대한 찬사)’ 등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을 향한 순수함이 존재했던 마지막 시대가 위대한 베토벤의 음악을 만들었다.

16. 베토벤 이후 시대는 ‘낭만주의’로 음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베토벤 시대의 고전주의(단호한 규칙)가 흔들렸다. 베토벤은 ‘음악적 투쟁’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로커’라고 할 수 있다. 농민과 노동자의 숨결을 귀족들의 오케스트라 안으로 끌고 들어와 (5번교향곡, 운명) 노골적으로 처절하게 인간의 상처와 대립, 갈등을 부각시켰다. 베토벤이 위대한 이유다. 베토벤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음악적 확신에 가득찬 로커였다. 모차르트가 목소리가 예쁜 ‘김경호’라면, 베토벤은 ‘임재범’ 같다고나 할까.

17. 베토벤은 강렬한 대립으로 같은 악장에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음악을 가져와 대비(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시켜 고통과 투쟁의 터널을 통과해 진정한 평화를 추구했다. 모든 계급을 넘어 연대와 소통, 손을 잡고 나아가자는 것이 베토벤의 음악적 결론이다.

18. 블루스는 흑인들의 노동요로, 흑인음악은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이야기하던 노래였다. 흑인들은 노예시절 대화조차 금지 당했고, 황야에서 하늘을 향해 소리인지 말인지 모르게 외치던 게 흑인음악의 시작이었다. 백인들은 그들의 음악도 가로채간다. 그러자 흑인들은 블루스를 리듬앤블루스로, 록앤롤로, 재즈로 끝임 없이 창조해간다. 1960년대 쏘울, 그 후엔 디스코, 힘합, 랩으로 끊임없이 상처와 억압을 뛰어넘고 승화시켜 음악으로 창조하고 있다.

노무현레퀴엠 4악장 '시민레퀴엠'. 강헌씨는 추모앨범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노래로 시민레퀴엠을 꼽았다. 

노무현의 승리와 패배, 우리의 승리와 패배였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습니다. 추모앨범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도 밝혔습니다. 처음 음반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던 가수들의 2/3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사유로 연락이 되지 않던 이야기 등. 5월 19일 서울광장 추모문화제에 참여한 가수들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 추모앨범에, 추모문화제에 참여했다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를 넘어) 고마움까지 포함해 “문화적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은 현실적 정책 집행자의 자리로 그 고뇌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스타일(저들이 힘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듯 그렇게 해주기를 원했던 듯)에 있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 4대 개혁입법 중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실망한 듯했고 그럼에도 “그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 그의 패배는 우리 모두의 패배”라며 추모앨범 제작에 나선 이유를 설명할 때 또 울컥했습니다.

강연을 들었던 많은 분들이 같은 대목에서 ‘찡’하는 울림을 받았을 텐데요, 2001년 인사동 어느 막걸리 집에서 ‘강헌’과 ‘문성근’이 만나 민주당 대선후보를 손바닥에 써서 펼치기로 한 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노무현’이란 이름을 보고 웃었다는 얘기에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지금, 앞으로 4년 뒤 저와 여러분의 손바닥에는 과연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을까요? 부디 같은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기를 바라며 후기를 마무리합니다.

20013.05.23
오늘은 노무현 대통령의 4주기 날입니다. 
그분도 어제 우리와 함께 하셨을 거라 믿으며, 으뜸벗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