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3일 그날> 이제 그의 정신을 지키려합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당신이 꿈꾼 세상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를 위해”
※ 으뜸벗님의 말 - 2009년 5월 23일, 제 기억 속으로 가보려 합니다. 벌써 눈시울은 붉어지고 손에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일기처럼 쓴 글을 일부 가져와 조금 수정하면서 노짱을 떠나 보낸 그날, 그 아린 마음을 기록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담당 업무는 준법감시, 회사의 업무를 원칙대로 처리했는지를 사전에 검토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노짱이 대통령이 되던 2002년 노사모였습니다. 내성적이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때는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 노무현 후보가 떨어질 만하면 계단이 만들어지고, 또 길이 없어 머뭇거리면 계단이 만들어지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의 연속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매우 좋았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2006년 1월 제 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가 제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 향한 비난·조롱에 귀막고 눈감던 나날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저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귀 막고, 눈감았습니다. 그 당시 저희 사무실 풍경은 높은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하시면 조선·동아일보 등을 들고 부서장 앞에 모여, 노무현 대통령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너무도 부당한 공격인데, 저는 귀 막고, 눈감아 그분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듣지 않으려는 노력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2009년 1월에 ‘균상식육종’이라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29살에 결혼해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생하다가 2006년 1월에 큰아이가, 2008년 12월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둘째를 본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가장인 제가 암환자가 된 것입니다. 너무도 큰 고통이었지요. 더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병원에 갔다가 회사에 들러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산후조리 중이었던 집사람은 얼굴이(너무 많이 울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그러다 2009년 5월 23일 그날이 되었고, 제게는 너무도 생생한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그날이 지나갔습니다(제 일기장 같은 기록에 저의 큰아이 관점에서 쓴 그날의 기록이 있어 그대로 옮겨봅니다).
“우리 아빠는 노란색이 잘 어울립니다. 제가 더 어렸을 때, 동생 우혁이가 태어났습니다. 우혁이는 너무 자주 울고, 제가 좋아하는 엄마는 늘 우혁이 근처에 있어서 제가 많이 심심해하던 기억 속의 어떤 날, 아빠가 호수공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아주 큰 호숫가에서 아빠랑 뛰고, 손잡고 걷고, 즐겁게 놀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더니 아빠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아빠랑 저랑은 버스를 타고 덕수궁에 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큰 길가에 작은 하얀 천막 안에서 노무현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너무 긴장해서 얼어붙었고 울고 있는 아빠의 눈가를 제 소매로 닦아주었습니다. 아빠가 저를 꼭 껴안고 우혁이보다 더 크게 꺼억꺼억 울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났지만 아빠가 울어서 울 수 없었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함께 있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던 그 시절, 큰아이와 호수공원 산책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싱그러운 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콩콩거리며 잘 뛰고 신나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고, 미안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집사람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야, 놀라지 마.(침묵)”
“(너무도 무뚝뚝하게) 왜?”
“노 대통령이 등산 갔다가 많이 다치셨대”
“뭐~?”
사실 그때만 해도 다치신 줄만 알았습니다(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긴 있는데, 돌아가시지만 말았으면 했습니다). 그길로 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뉴스는 온통 속보였고, 제가 처음 본 영상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란 자막과 문재인 비서실장님의 짧은 발표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졌는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집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가 너무 놀랄까봐 서거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4살짜리 아이가,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날’
바로 큰아이만 데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갔습니다. 줄이 아주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분향을 하기까지 4살짜리 어린아이가 서있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날씨는 조금 더웠고, 큰아이는 목마르다고 했습니다. 물을 사주고 싶었는데, 줄을 벗어나면 또 긴 시간의 기다림이 있을 것 같아 그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줄 선 분들이 아이의 목마르다는 찡얼거림을 듣고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온음료 하나를 사서 아이에게 먹이는데, 저희가 분향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의 절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폭풍 눈물이 쏟아집니다. 아이를 잡고 엉엉 울었습니다. 겨우, 우리나이로 겨우 4살이 된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자기 소매로 제 눈물을 닦아줍니다. 저는 그날 그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날 제 눈물 속에 녹아있던 한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내내 제가 사무실에 앉아서 근무하던 그 당시, 저에게만 고문이고 고통이라 힘들다고 생각했지, 상사분들이 그분을 그렇게 욕할 때 그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제 자리에서 앉아, 저주를 퍼붓던 그들에게 단 한마디 반론도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책했던지….
여기서 제 글을 줄이려 합니다. 순식간에 써내려가는 동안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누가 저를 볼까 두렵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정신을 지키려 합니다.
* 추신: 혹 제 건강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으실까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은 건강하답니다.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에 제 아이들이 살아갈 것이라고 꿈꾸며 질기게 버티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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