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남동생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아렸습니다.
“형, 나 집 팔렸어”, “어, 그래 얼마에”
“2억 7천 5백”, “얼마 주고 샀었지?”
(눈물 꾹꾹 참고 있는 목소리) “3억 2천”, “그래 (그래도) 잘 정리한 것 같다.”
“어, 그냥 집 팔렸다고”
저는 밤새도록 잠을 쉽게 못 들고, 뒤척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2남 1녀의 장남으로 때로는 과도한 무게 감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쩌면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과 혜택을 자라는 동안 제가 독차지 한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남동생은 1973년 생입니다. 공업고등학교 전기 과를 나와 졸업하자 마자 취업을 하고 군대도 병역특례로 마치고, 중간에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지금 40이 되기까지 그는 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 4월초 동생이 다니던 외국계 통신회사가 갑자기 한국의 사업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제조 공장을 옮긴다며, 사업장이 폐쇄를 통보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갑자기 실직을 했습니다. 둘째 조카 돌을 한지 불과 몇 개월 만이었고, 회사의 폐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주로 무전기 만드는 회사의 생산관리(이 일을 오랫동안 했는데, 혹 이런 인력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일은 하던 동생이 몇 주간 재취업을 알아보고 있으나 마흔이 넘은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습니다. 연봉에 퇴직금이 포함되어 있다며, 퇴직금 지급도 없이 떠나버린 회사 때문에 동생은 갑자기 경제적으로 무일푼이 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10년에 입주한 경기도 파주 운정지구의 아파트 원리금이 그에겐 큰 부담이 되었던 겁니다. 때문에 결국은 집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땠을 까요?)
사실 그 운정지구 아파트는 일산에 살고 있던 제가, 낡아가는 아파트에서 새 아파트로 옮겨 살고 싶어서 청약을 알아보던 차에 같이 모델 하우스 구경 다니던 동생 가족에게 20평 대 집은 어차피 아이들 크면 늘려가야 된다고 권해, 동생이 약 1억5천 정도를 대출 받아 미 분양된 아파트를 구입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저는 제명의의 집이 있어 가지고 있던 집을 판 후에 사려고 제 집을 매물로 내놓았으나 팔리지가 않았고 그 동안 부동산 가격은 정점을 찍고 대세 하락 기가 되다 보니 결국은 동생만 아파트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2009년에 계약해서 2010년에 입주했으니 약6년 동안 대출금 중 약 5천 정도는 갚았나 봅니다. 지금 남은 원금이 약 1억 원 정도 된다고 하고, 아파트도 구입한 가격에서 약 4천5백 정도 손해를 보고 팔았으니 그 마음이 어떨지 저는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으로 이끈 사람이 저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실 남동생이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당연한 듯 작은 아파트 하나 구해줘라 하실 때, 조금은 도와 줄 수 있으니 전세 알아보고 연락하라 하였더니(18평 정도 되는 작은 아파트 계약하기를 바랬는데) 20평 초반 대 아파트를 계약했다고 도와달라고 할 때 많이 속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때 저로서는 큰 돈인 약 4천만 원을 그냥 주면서 제 집사람이 아무런 반대도 안 해서 너무도 고마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준 돈보다 큰 손실을 끼친 것 같아 너무 미안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칠순이 되시는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갑니다. 여행 일정을 다 마련했을 때 동생이 갑자기 실직을 해서 여행 자체를 취소할 까 하다가 어쩌면 온 가족의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냥 예정대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렵니다. 칠순이 되어 아직도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나이 마흔에 갑자기 실직을 한 남동생과, 언제부터인가 늘 언제까지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 불안한 저와 조그마한 식품(주로 소스 류) 납품 업을 하는 여동생 가족과 주로 이야기할 것은 아마도 시시콜콜한 과거의 추억들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야기할 아름답던 기억도, 슬픈 추억도 모두 동생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2년 동안 두 번씩이나 지주경막하 출혈로 뇌수술을 받으시던 아버지께서 마취가 풀리시면 제일 먼저 걱정하시던 것이 본인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칠순이 된 어느 노인의 두려움이 이제 마흔이 된 아들에게 전이되는 사회는 여기서 멈추었으면 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풍족하게는 아니더라도 가족과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회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동생이 조금은 더 이른 시간 안에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 미안함이 많이 중화될 것 같습니다. 제 바램을 응원해 주세요.
2013.04.10 으뜸벗(장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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