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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 정치

이호철이 이야기하는 노무현의 숨결

이호철이 이야기하는 노무현의 숨결

 

위키백과에 따르면 부림 사건은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신 군부 정권 초기인 1981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김광일, 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맡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간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이호철님을 처음 만나는 날입니다. 노무현의 참모들의 강연은 기회가 있어도 가급적 피했습니다. 제가 제 감정을 아직도 추스를 수 있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연 장을 들어서는데 김경수 비서관의 팬클럽(미소천사)에서 준비해준 빵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이호철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호철 비서관의 인연은 부림 사건이 시작이다. 63일 동안 대공분실에 무단 감금되어있던 때 변호인 노무현을 처음 만났다.

 

노의원(노무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5명의 보좌관을 둘 수 있었으나 10명이 일하며 월급을 다 합쳐서 1/n로 나누어 받았다. 88년 당시 보좌관 월급이 280만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결혼한 보좌관이라 남들보다 더 받은 금액이 80만원 정도 받았던 것 같다.

 

노의원은 대중 강연이 잡히면 장소, 시간, 참석하는 사람 수 등을 철저하게 체크해서, 대상에 따라 연설을 달리했다. 처음부터 연설을 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차가 콩고드였는데 1년에 20만 킬로를 달렸다. 그 만큼 강연 요청이 많았다. 보좌관들은 울산, 창원, 거제, 부산 등 노동현장을 나누어 현안파악을 했다.

 

노동강연에 비해 학생강연은 그 준비가 쉽다. 노동현장은 현안이 다 틀리기 때문이다. 노의원은 1년이 지나니 보좌관들이 그의 지시사항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발전했다.

 

노대통령 이야기 하면 아프다.

 

봉화음악회 때 명계남 선배가 성광을 봤냐?’고 물었다. 무슨 질문이었는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이호철)는 그(노무현)가 너무 가까이 있어 빛인지 몰랐다.

 

슬플 때 어떻게 하나?

 

난 가만히 생각한다. 나는 빛과 함께 있었는데 왜, 빛이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부산대 77학번이다. 노무현은 나에게 변호사였고, 국회의원이었고, 낙선 위원장이고, 주례 선생님이고, (대통령)당선자고, 대통령이었고, (봉화마을로 내려와서는) 시민의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형님이었다.

 

인생이 죽음이 무엇입니까?

 

나는 민정비서관을 했었는데 친인척관리, 권력기관 동향 등을 담당하는 부서다. 청와대에는 500여명의 직원이 있고 수석 10, 비서관 50, 행정관이 각 비서관 실 별로 5~20명 정도 된다. 그 밖에도 5대 권력기관을 관할하고, 고위공무원 감찰과 검증 등을 담당했다.

 

제도개선비서관과 국정상황실장도 각각 2년 정도 했다. 5~530분 정도면 출근하여 6~630분 아침식사하며 회의를 하고 8시 비서실장 주제 현안점검 회의를 포함해서 많으면 8, 적어도 5개의 회의를 했다. 임기 말에 민정수석으로 두 달 근무했다. (따라서 이수석이라 불리면 어색하고 이실장이라 불리면 편하다.)

 

노변호사는 아스팔트 위의 변호사라 불렸다. 다른 인권 변호사랑도 달랐다. 보통의 인권 변호사들은 성명서에 이름 넣고, 형편 되면 돈 내고, 무료나 저가로 변론해주는 방식이었다면 노변은 같이 싸웠다. 따라서 법조계에서는 안 좋아했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전 82~3년 부산에는 신발공장이 많았다. 10대 후반 20대 여성들이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고 노조도 없이 또는 어용노조만 있었던 시절 학생들에게 정의감을 봤다면 노변은 이 노동자들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다른 모습을 본다.

 

노변은 부산에서 다섯 손가락 안의 변호사로 잘 살았다. 그러나 나에게 조차 반말하지 않았다. ~ 호철씨라고 불렀고, 겸손하고 샤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사람들이 여공들을 보곤 차를 두고 버스 타고 다녔고, 문변호사와 일하면서는 일반사건이 아닌 노동사건만 맞겠다고 했다.

 

나는 부림 사건으로 10.26이후에도 긴급조치로 계속 수감되었다. 23명이 공범이라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1심에서 검찰은 10년을 구형했고, 무죄로 판결 났으나 결국 2년여를 살고 나왔다. 이 재판 때 노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체크 무니 양복입고 변론을 했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변호를 맞아준 5분 변호사에게 인사할 때 노변에게 갔더니 밥 먹으로 가자고 했다. 꼬리곰탕을 사주더니 목욕 가자고 했다. 같이 목욕하고, 술 먹고, 하도 잘해주기에 우리에게 왜 이럽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세상에는 맛있는 것 좋은 것 많다. 취직도 하고, 나라걱정만 하지 말라고 하더라, 독특하다는 느낌이었다.

 

금서(금지서적)가 나오면 노변에게 가져다 주었다. 고갈비(고등어 구이) 먹으면서 토론했다. 노변은 우리를 변론하면서 학생들이 수년 동안 읽었던 책을 다 읽었더라(노천재), 토론, 대화가 무르익어 갔다.

 

노변이 부산 동구에 국회의원 출마하며 허삼수가 상대였다. 노변은 지역구도를 돌파하고 싶다고 했다. 이인제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대통령 출마를 하겠다고 했다.

 

이후 북강서을에 출마하면서 명함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넣었다. (선거)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는 욕먹었지만 반응은 좋았다.

 

노의원은 얼리어답터였다. 노의원이 종로 국회의원 시절에 3개월 더부살이를 했었는데 많은 유권자를 만났지만 얼굴과 이름을 매칭하는 것이 어려웠다. 노의원은 노하우2000을 개발했고 이는 이지원 시스템의 초안이 되었다. (설계는 노통이 직접 한 샘) 노의원은 선거 운동원들에게 노하우 2000을 쓰지 않으면 선거 운동하러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진화하는 혁신가였다. 실제로 게시판 댓 글도 직접 달고, 원고도 직접 쓴다.

 

불만들 없냐고 묻는다면?

 

노통은 실용적인 사람이다. 단 한번 혼났다. 그러나 칭찬도 잘 안 한다. (빈말 없고, 욕도 없다.) 대통령 후보시절까지 맞담배를 폈다. 기호식품(담배)으로 권위 부리지 않았다.

 

청와대에 근무해보면 정보의 량의 권위다. 정보독점이 권력행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노통은 정보란 공유하는 것, 단 보안에 유의할 것을 강조했다.

 

당시에 수석-> 보좌관-> 행정관으로 정보를 공유해야 하다 보니 회의가 많아졌다. 이때 폐쇄회로TV로 수석 회의를 공개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지원의 시작이다.

 

봉하마을로 내려가는 퇴임 한두 달을 앞두고 노통은 한국대통령의 유형을 분석해보고 싶다고 했다. ‘호철씨가 도와달라고 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내가 기억하는 노무현은 용감하면서 부끄럼 많은 사람이고 삶은 감자와 생 고구마를 즐겨먹던 촌놈 그러나 빛인지 모르고 가까이 있었다. 시민 노무현은 봉하에서 행복해했다. 방문하신 시민들과 하루 최대 500여장의 사진을 찍던 일, 그건 노무현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건평(노무현 대통령 형님)이 구속되고 고통스러웠다. 유시민의 건의로 시민들께 인사 나오는 것을 중단했다. (따뜻해지면 다시 하기로 했지만 이게 마지막이 되었다.)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나?

 

허삼수를 이길 때, (그때는 밤을 새워 체육관에서 수작업 개표하던 시절), 주무시러 가며 어떻게 될까?” 물었다. 새벽5시 개표 중에 누군가가 백허그를 해왔다.(노무현 의원이었다.) 노무현의 체온이 아직 내 등에 남아있다.

 

노무현의 참모들은 생업 때문에 그만둔 사람은 있어도 배신한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정리하며 또 울고 있네요…… 그리 울지 않으려 했는데……으뜸벗이 정리했습니다. ()